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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으로 읽는 한국사

박은봉의 <한국사 편지 4>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 성립까지(150p~257p)

by 고전윤쌤 2026.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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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봉의 <한국 편지 4> 정보

 

  • 서명: 한국사 편지 4 (부제: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 성립까지)
  • 저자: 박은봉
  • 출판사: 책과함께어린이
  • 초판 발행일: 2009년 5월  22일
  • 쪽수: 약 257
  • 내용 소개: 조선 건국부터 조선 후기까지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편지 형식으로 서술한 교양 역사서
  • 그림 / 구성: 박은봉 글, 류동필 외 그림

 

 

박은봉의 <한국사 편지 3>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 성립까지(150p~257p)

 

 

<한국사 편지 4> 질문별 핵심 답변

 

1. 161쪽)  왜 흥선 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썼을까?

 

 

 첫째, 왕권과 국방의 수호를 위해서였다. 당시 아편 전쟁으로 청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서양 세력을 침략자로 간주했고, 무력 충돌을 피하고자 문을 닫았다. 둘째, 유교 질서의 유지다. 천주교의 평등 사상이 신분제와 충효를 중시하는 조선의 근간을 흔든다고 판단했다. 셋째, 오페르트 도굴 사건 등으로 인한 서양인에 대한 극심한 반감과 불신 때문이다. 이러한 의지는 전국 각지에 세워진 척화비에 잘 나타나 있으며,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문구를 통해 쇄국에 대한 강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2. 162쪽)  왜 흥선 대원군은 백성들의 힘을 모아 외세의 침입을 막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 힘을 자주적인 근대화로까지 이끌어 가지는 못했을까?

 

 

 흥선 대원군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서구 열강의 1차 침략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으나, '전통 수호'라는 틀에 갇혀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을 읽지 못했다. 이러한 쇄국 정책은 조선이 스스로를 근대적으로 개혁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을 늦추게 된 아쉬운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3. 164쪽)  조선 시대의 의궤가 프랑스 국립도서관 지하 창고에 있게 된 이유는?

 

 

 흥선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를 구실로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군(1866년 병인양요)은 강화도에 있던 왕실 도서관인 외규장각을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외규장각에 불을 질러 수많은 서적을 소실시켰으나, 그중 어람용 의궤 297권을 포함한 340여 권의 도서를 약탈하여 프랑스로 가져갔다.

 

 프랑스군은 약탈 당시 의궤의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프랑스로 옮겨진 의궤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중국 서적'으로 잘못 분류되어 오랜 시간 동안 잊혀졌다.  의궤는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베르사유 분관에 있는 '지하 창고'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었다. 

 

 이후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가 1975년에 이 의궤들을 극적으로 발견하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오랜 노력 끝에 2011년 영구 임대 방식으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4.  176쪽)  조선과 일본의 '강화도 조약'이 불평등 조약인 이유는?

 

 

 이 조약은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으나, 일본의 강압적인 무력시위(운요호 사건) 아래 체결되었으며 조선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독소 조항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 치외법권(영사 재판권) 인정: 조선 땅에서 죄를 지은 일본인을 조선의 법이 아닌 일본 영사가 재판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조선의 사법권을 무시한 처사로,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해를 끼쳐도 제대로 처벌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 해안 측량권 허용: 일본 군함이 조선의 해안선을 자유롭게 측량할 수 있도록 허가한 조항이다. 이는 국가의 군사 기밀과 영해권을 내준 것과 다름없으며, 훗날 침략의 발판이 되었다.
  • 교묘한 제1조 (조선은 자주국이다): 겉으로는 조선을 배려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차단하여 일본이 조선을 더 쉽게 침략하려는 외교적 포석이었다.

 

 

  178쪽) 관세 문제가 가장 심각했던 이유

 

 강화도 조약의 부속 조약(조일 무역 규칙)에는 '무관세' 원칙이 들어있었다. 이는 조선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일본의 값싼 기계식 면제품이 관세도 붙지 않은 채 무분별하게 들어오자, 조선의 전통 수공업(무명, 베 등)이 가격 경쟁력에서 밀려 완전히 붕괴되었다. 관세는 국가의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다. 하지만 일본 상품에 세금을 매기지 못하게 되면서 조선 정부는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관세와 더불어 곡물의 수출입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대량 빠져나갔다. 이로 인해 조선 내부의 쌀값이 폭등하여 백성들의 삶이 굶주림으로 고통받게 되었다.

 

 결국, 관세가 없다는 것은 조선의 경제적 빗장을 완전히 열어준 것과 같았으며, 이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문제를 넘어 조선 경제를 일본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5. 194쪽)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외세(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하였다. 당시 일본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개화파를 돕겠다고 약속했으나, 막상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자 약속을 어기고 곧바로 후퇴해 버렸다. 우리 민족의 문제를 스스로의 힘이 아닌 외세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 했던 점이 결국 실패의 단초가 되었다.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함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개화파는 지식인과 일부 관료 중심으로 움직였을 뿐, 당시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과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계획을 알리고 지지를 구하는 노력이 부족했다. 

 

 청나라는 예상을 깨고 대규모 군대를 즉각 투입하여 창덕궁을 공격했다. 수적으로나 화력으로나 열세였던 개화파와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를 당해낼 수 없었다.    

 

 개화파는 결과적으로 준비 부족인 상태에서 너무 급하게 세상을 바꾸려다 보니 정밀한 계획 수립과 반대 세력에 대한 대비가 허술했다.

 

 

 

6. 196쪽)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킨 이유는?

 

 

 정부가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면서 구식 군인들은 찬밥 신세가 되었다. 별기군은 좋은 옷과 최신식 무기를 지급받으며 우대를 받았지만, 구식 군인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무시당했다. 구식 군인들은 무려 13개월 동안이나 월급인 쌀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겨우 지급된 쌀에 모래와 겨가 섞여 있고, 그마저도 썩어서 먹을 수 없는 상태인 것을 확인하자 그동안 쌓였던 분노가 폭발했다. 당시 군인들의 급료를 관리하던 관료들이 쌀을 빼돌려 사익을 챙겼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군인들은 단순히 배고픔을 넘어 부패한 권력층(민씨 정권)에 대한 정치적 저항을 시작하게 되었다.

 

 

 

7. 206쪽) 전봉준은 왜 농민들의 봉기에 앞장 서게 되었을까?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맞서 항의하다가 매를 맞아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가 백성들을 위해 싸우다 희생되는 모습을 본 전봉준은 부패한 관료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되었다. 당시 고부 군수 조병갑은 멀쩡한 보가 있음에도 강제로 '만석보'를 새로 쌓게 한 뒤, 농민들에게 과도한 물세를 걷는 등 온갖 구실로 백성들을 착취했다.

 

 또한 전봉준은 모든 사람이 하늘처럼 귀하다는 동학의 가르침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보았다. 그는 단순히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을 넘어, 신분제가 타파되고 외세의 침략이 없는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농민들을 하나로 모으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8. 211쪽) 전주 화약으로 농민군은 해산했지만 왜 일본군과 청군은 물러가지 않았을까?

 

 1894년, 동학 농민군과 정부군 사이의 전쟁을 멈추기로 약속한 '전주 화약'이 맺어지자 농민군은 스스로 흩어졌다. 하지만 조선에 들어온 외국 군대들은 떠나지 않았다. 일본은 처음부터 농민군을 진압하는 것보다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주도권을 잡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내정이 불안하니 개혁을 도와주겠다"는 핑계를 대며 오히려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청나라는 역시 일본군이 물러나지 않자, 자신들이 먼저 철수할 경우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을까 봐 두려워했다. 결국 두 나라는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물러나지 않고 버티다가, 일본이 선제공격을 감행하며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은 외세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9. 227쪽) 일본인들은 왜 명성황후를 죽였을까?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독점하려 했으나 명성황후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일본은 명성황후만 제거하면 조선을 다시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명성황후를 살해함으로써 고종 황제와 조선 조정에 공포심을 심어주고, 친일 내각을 세워 자신들의 입맛대로 조선을 주무르기 위함이었다.

 

 

 

  229쪽)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왜 영영 해결되지 못하고, 안개 속에 묻히고 말았을까?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은 명백한 국가적 범죄였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단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본은 범행 직후 시신을 불태워 흔적을 없애버렸다. 또한, 사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와 낭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간 뒤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모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일본 정부가 조직적으로 범죄를 은폐한 것이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일본의 압박 때문에 독자적으로 수사를 진행하거나 국제 사회에 강력하게 항의할 힘이 없었다. 일본은 마치 이 사건이 조선인 내부의 갈등(훈련대와 대원군의 소행)인 것처럼 조작된 보고서를 퍼뜨려 국제 사회의 눈을 속였다.

 

 

10.  236쪽) 왜 고종은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을까?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 만에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1897년,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조선은 대외적으로 중국(청나라)의 신하 나라라는 인상이 강했다. 고종은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이제 조선이 청나라나 일본과 대등한 위치를 가진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모으고 국왕 중심의 강력한 근대화 개혁(광무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황제라는 절대적인 권위가 필요했다. 또한 외세의 침략으로 국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대한(큰 한민족의 나라)'이라는 새 이름을 통해 백성들에게 나라의 위엄을 보여주고 독립 의지를 다지려 했다.

 

 

 왜 고종과 세자는 1년 동안 러시아 공사관에서 살았나? (아관파천, 1896)

 

 

 고종과 세자가 궁궐을 버리고 외국 공사관(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사건을 아관파천이라 한다. 을미사변의 충격으로 왕비(명성황후)를 잃은 고종은 신변의 위험을 느끼게 되어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고종은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당시 일본과 대립하던 또 다른 강대국인 러시아의 힘을 빌려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했다.

 

 

11. 249쪽) "우리는 오늘 문명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문명이란 과학 기술, 철도, 전기와 같은 편리한 시설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문명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계획하고, 우리 민족의 필요에 맞게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당시 조선(대한제국)에 들어온 철도, 전신, 전기 시설 등은 대부분 일본이나 서구 열강의 자본과 기술로 세워졌으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었다. 따라서 진정한 문명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외세에 의존하는 태도를 버리고 실력을 길러 자주적인 독립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한 호소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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