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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으로 읽는 한국사

박은봉의 <한국사 편지 5> 대한제국부터 남북 화해 시대까지(~143p)

by 고전윤쌤 2026.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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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봉의 <한국 편지 5> 정보

 

  • 서명: 한국사 편지 5 (부제: 대한제국부터 남북 화해 시대까지)
  • 저자: 박은봉
  • 출판사: 책과함께어린이
  • 초판 발행일: 2009년 6월 9일
  • 쪽수: 약 299
  • 내용 소개: 대한제국부터 남북 화해 시대까지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편지 형식으로 서술한 교양 역사서
  • 그림 / 구성: 박은봉 글, 류동필 외 그림

 

 

 

 

박은봉의 <한국사 편지 5> 대한제국부터 남북 화해 시대까지(~143p)

 

 

 

<한국사 편지 5> 질문별 핵심 답변

 

1. 17쪽)  대한제국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간 건 왜 '영국, 미국 등 서양 강대국들의 이해 다툼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라고 했을까?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과정을 단순히 한일 양국 간의 문제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20세기 초는 이른바 '제국주의의 황금기'로 강대국들이 전 세계를 나누어 가지기 위해 서로의 침략을 묵인하던 시대였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았고(영일 동맹),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했다(가쓰라-태프트 밀약). 즉, 대한제국은 국제 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되었으며, 서양 열강들에게 조선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 일본에 넘겨줄 수 있는 '협상 카드'에 불과했다.

 

 

2. 19쪽) 왜 대한제국은 외교권도 없고, 군대도 없는 나라가 되어 버렸을까?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는 나라의 입 노릇을 하는 창구를 폐쇄한 것과 같다. 뒤이어 1907년에는 군대마저 해산시켰는데, 이는 나라를 지킬 최소한의 물리적 힘마저 없애버린 것이다. 외교권이 없으니 국제 사회에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고, 군대가 없으니 침략에 저항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3. 42) 유희순은 왜 유씨 집안 안사람들과 동네 안사람들을 모았을까?

 

 유희순은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제약받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구하는 데 남녀가 따로 없음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그녀는 의병장이었던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의 활동을 곁에서 지켜보며, 전쟁은 군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깨달았다. 여성들이 모여 의병의 군자금을 모으고, 밥을 지어 나르며, 탄환을 제조하는 등의 후방 지원은 의병 부대의 실질적인 생존과 직결되었다. 유희순이 지은 '안사람 의병가'는 당시 여성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녀는 여성들이 집안에만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당당한 역사의 주체로서 일제와 싸워야 한다는 '의식 개혁'을 주도한 선구자였다.

 

 

 

4. 46쪽)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은 주범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일본이 진정으로 동양의 평화를 원한다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외적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한국을 침략하고 아시아 전체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기만적인 인물이었다. 안중근은 재판장에서 이토의 죄악 15가지를 조목조목 나열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등을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일본의 침략이 정당하지 않음을 폭로하고자 했다.

 

 

 

 

5. 68)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른 후 자수한 이유는?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실제 참석 29인)이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식을 거행한 후 스스로 경찰에 전화를 걸어 자수한 사건이다. 민족 대표들은 독립운동이 자칫 대규모 유혈 사태로 번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자신들이 자진해서 체포됨으로써 이 운동이 폭동이 아닌 성숙한 민족의 평화적 의사 표시임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비폭력 운동의 원칙을 고수한 것이다.  

   

 또한 지도자들이 당당히 체포되는 모습은 국제 사회에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일본의 무력 진압에 맞서 평화적으로 저항하는 지도자들의 모습은 조선의 독립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였다.

 

 

 

6. 76) 3.1운동은 독립을 당장 이루지는 못했지만 독립 운동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3.1 운동은 현장에서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근현대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꾼 사건이다. 3·1운동 이후,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방식과 범위가 크게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3.1 운동을 통해 분산되어 있던 독립역량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는 상하이 임시 정부 수립 되어, 독립운동이 체계적·조직적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비폭력 만세운동뿐 아니라 외교 활동, 무장 투쟁, 문화 운동 등 여러 방식의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일제는 무력으로만 억누르던 '무단 통치'의 한계를 느끼고, 겉으로나마 회유하는 '문화 통치'로 방침을 바꾸게 되었다. 

 

 

 

7. 88) '간도 학살'(경신참변)'이 일어난 이유는?

 

 

 당시 간도는 많은 조선인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주한 곳으로 독립군 부대와 독립운동 단체가 활발히 활동한 지역이기도 하다. 당시 봉오동 전투(1920)와 청산리 대첩(1920)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격파한다. 일본군은 처참히 당한 참패를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활동 근거지인 한인 마을을 초토화하기로 결심했다. 독립군에게 식량과 정보를 제공하는 민간인들을 학살함으로써 독립군의 숨통을 끊어놓으려 했던 것이다.일본군은 한인 마을을 돌며 집을 불태우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라, 간도 지역에서 우리 민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 했던 반인륜적인 범죄였다.

 

 

 

 

 

 

8. 107방정환의 어린이 운동은 왜 어른들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생각 바꾸기'운동이기도 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방정환의 어린이 운동은 단순히 아이들을 사랑하자는 캠페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뿌리 깊은 유교적 가부장제와 봉건적 사고방식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당시 아이들은 부모의 소유물정도로 취급받았다. 방정환은 '어린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그들에게 독립적인 인격을 부여했다. 아이들을 존중하는 마음이 곧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어지며, 이는 곧 민주적인 시민 사회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믿었다.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방정환은 '어린이'를 우리 민족의 유일한 희망으로 보았다. 아이들이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자라야만 훗날 독립된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9. 114) 관동 대학살과 연해주 강제 이주는 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과거인가?

 

 이 두 사건은 우리 민족이 타국에서 겪은 가장 처참한 비극이며, 국가가 없을 때 국민이 어떤 고초를 겪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관동 대학살은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 지방에 발생한 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발생했다. 대지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 정부와 경찰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이 방화를 저지른다"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했다.

 

 일본의 자경단과 군경은 죽창과 총칼로 무고한 조선인 6,000여 명 이상을 학살했다. 이는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재난으로 향한 일본 국민의 불만을 외부(조선인)로 돌리기 위해 국가가 방조하고 조장한 '국가 범죄'였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 :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이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나 진상 규명을 회피하고 있다. 우리가 이 사건을 정확히 기억하고 기록하지 않는다면, 억울하게 죽어간 동포들의 명예를 회복할 수 없으며 반복되는 역사적 왜곡에 대응할 논리를 가질 수 없다.

 

 

연해주 강제이주는 1937년, 소련의 스탈린 정권은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카레이스키) 약 17만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일본의 첩자가 섞여 있을 수 있다는 보안상의 이유를 내세웠으나, 실상은 소수 민족에 대한 탄압이었다.

 

 화물 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한 달 넘게 이동하는 동안 수많은 노약자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도착한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황무지는 생존이 불가능해 보였으나, 고려인들은 맨손으로 땅을 파고 토굴을 만들어 겨울을 나며 벼농사를 성공시켰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 : 강제 이주는 우리 민족이 겪은 거대한 '디아스포라(흩어진 민족)'의 역사이다. 척박한 땅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남은 고려인들의 역사는 독립운동사의 연장이기도 하다. 그들을 우리 역사의 일부로 포용하고, 국가의 힘이 약할 때 재외 동포들이 겪는 고난을 잊지 않기 위해 반드시 배워야 한다.

 

 

 

10. 143) 박은식과 신채호는 둘 다 민족'을 중심에 놓고 역사를 연구했다. 왜 신채호는 고대사에 온 힘을 기울였고, 박은식은 현대사에 더 많은 힘을 기울였을까?

 

 

신채호와 고대사 : 신채호는 우리 민족의 '아(我)'라는 주체성이 고대사의 웅건한 기상(고구려, 부여 등)에 있다고 보았다. 일제가 조선의 역사를 '무기력하고 정체된 역사'라고 왜곡하자, 이를 반박하기 위해 우리 민족이 얼마나 강인하고 독자적인 문명을 일구었는지를 증명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박은식과 현대사 : 박은식은 나라가 망해가는 긴박한 상황에서 '왜 망했는가'를 기록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아픔과 저항의 역사를 생생히 기록했다. 비록 나라는 형체(形)로서 사라졌으나, 역사라는 정신(神)이 살아있다면 반드시 독립할 수 있다는 '국혼(國魂)' 사상을 전파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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