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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으로 읽는 한국사

박은봉의 <한국사 편지 3>_조선 건국부터 조선 후기까지(~121p)

by 고전윤쌤 2026.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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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봉의 <한국사 편지 3> 정보

 

  • 서명: 한국사 편지 3 (부제: 조선 건국부터 조선 후기까지)
  • 저자: 박은봉
  • 출판사: 책과함께어린이
  • 초판 발행일: 2009년4월  21일
  • 쪽수: 약 235
  • 내용 소개: 조선 건국부터 조선 후기까지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편지 형식으로 서술한 교양 역사서
  • 그림 / 구성: 박은봉 글, 류동필 외 그림

 

 

박은봉의 <한국사 편지 3>_조선 건국부터 조선 후기까지(~121p)

 

 

<한국사 편지 3> 질문별 핵심 답변

 

1. 11쪽~14쪽) 왜 조선의 건국의 시작이 위화도 회군일까?

 

 1388년의 위화도 회군은 단순한 군대의 이동이나 일시적인 항명이 아니다. 이는 고려라는 500년 사직이 저물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는 결정적인 정치적 분기점이다. 당시 고려는 안으로는 권문세족의 부패와 밖으로는 명나라와의 갈등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성계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진격한 사건은, 부패한 기득권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아 새로운 질서를 세우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이성계는 군사권과 정치권을 동시에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는 조선 건국으로 가는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2. 14쪽) 왜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반대했을까?

 

 이성계가 최영 장군의 요동 정벌 명령에 반대한 이유는 감정적인 거부감이 아니라 철저히 현실적인 분석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이른바 "4불가론"을 내세우며 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유교적 명분에도 그릇되며 현실적인 전력 차이에서도 위험하다. 

  2) 농번기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국가 경제의 근간인 농사를 망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일이다.

  3) 나라의 군대가 요동으로 떠나면 남쪽에서 침략해오는 왜구를 막을 수가 없다.

  4) 장마철이라 무가기 녹슬기 쉽고 군사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 우려가 크다.

 

 이러한 합리적 판단은 결국 위화도 회군의 명분이 되었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다.

 

 

 

3. 22쪽) 새 나라의 이름은 왜 '조선'이 되었을까?

 

  새로운 나라를 세운 이성계와 정도전은 민족의 뿌리와 정통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들이 선택한 이름은 단군이 세웠던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이는 기자조선과 단군조선의 유구한 역사를 잇는다는 선언이었으며, 명나라로부터 국호를 승인받는 과정에서도 '가장 유서 깊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인정받다. '조선(朝鮮)'은 아침 조(朝)와 고울 선(鮮)을 써서 '아침이 깨끗하고 빛나는 나라'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이는 고려 말의 어두운 시대를 끝내고 밝고 도덕적인 정치를 펼치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다.

 

 

 

4. 29쪽) 새 나라 조선의 도읍지는 왜 한양으로 결정되었을까?

 

 개경은 500년 동안 고려의 수도였기에, 이성계에 반대하는 권문세족과 구세력의 기반이 매우 강했다. 새로운 나라를 세운 신진사대부와 이성계는 기존 세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치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개경을 떠나야만 했다.  한양은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전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한강을 끼고 있어서 서해안을 통해 들어우는 물자수송과 경제 활동에 이점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풍수지리적으로  북앙산, 인왕산, 낙산, 남산에 둘러 싸인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명당이였다. 

 

 

 

5. 54쪽) 세종은 왜 한글을 만들었을까?

 

 

세종대왕은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한글을 만들었다. 당시 한자는 배우기 너무 어려워 일반 백성들은 배우기 불가능했다.  이로 인해 자신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처벌받거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관청에 하소연할 길이 없었다. 세종은 백성들이 자기 뜻을 편하게 글로 표현하고, 지식을 습득하여 스스로 삶을 개선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였다.

 

 또한 중국의 글자인 한자는 우리말의 어순이나 발음을 온전하게 담아내지 못했다. 세종은 우리만의 독자적인 문자 체계가 필요함을 깨닫고 우리만의 글자를 만들기로 했다.

 

 

6. 54쪽) 세종은 왜 최만리 이하 일곱 명을 모두 감옥에 가두었을까?

 

 평소 토론을 즐기고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하던 세종이 최만리를 비롯한 반대파를 감옥에 가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최만리 등은 사대주의에 빠져 "중국과 다른 글자를 만드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짓"이라며 한글 창제를 강하게 비판하다. 세종은 이들이 논리적인 비판을 넘어 '백성을 가르치고 구제해야 한다'는 임금의 근본 통치 철학 자체를 부정하자, 국가적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다.이는 한글 창제가 얼마나 거센 기득권의 저항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7. 55쪽) 여성들이 아니었다면 한글은 아마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말의 뜻은?

 

 한글 창제 이후 사대부들은 이를 '암클(여자들이나 쓰는 글)' 혹은 '언문'이라 부르며 무시했다. 하지만 궁중의 여인들과 양반가의 부인들, 그리고 서민 여성들이 한글로 편지를 쓰고 소설을 필사하며 실생활에서 끊임없이 사용했다. 이들이 한글의 생명력을 유지해준 덕분에 한글은 사장되지 않고 민족의 언어로 살아남아, 훗날 누구나 글을 깨우치는 기틀이 되었다.

 

 

863쪽) 조선시대에는 왜 돈이나 집안을 배경으로 하는 ‘낙하산’ 인사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을까?

 

 조선은 시스템에 의한 능력 중심 사회를 지향하다.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십수 년의 고통스러운 공부 끝에 과거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설령 집안이 좋아 음서(조상의 덕으로 관직에 오름)를 통해 관직에 나가더라도, 핵심 요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 합격증이 필요했다. 특히 관리 임명 시 후보자의 5대조까지 배경을 조사하고 도덕성을 검증하는 '서경' 제도가 있어, 대간(비판 기구)이 동의하지 않으면 왕조차 인사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호 견제 시스템이 부정부패를 막는 방패 역할을 하였다.

 

 

9. 67쪽) 이이는 왜 병조판서가 됐을 때, 병조에서만큼은 면신례를 못 하게 했을까? 

 

  '면신례'는 신참 관리가 선배들에게 호되게 신고식을 치르는 악습이었다. 거액의 음식을 대접하거나 인격 모독에 가까운 장난을 견뎌야 했는데, 이이는 이것이 유교적인 예의에 어긋나고 공직자의 자존감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한다. 그는 병조판서라는 권한을 사용하여 이 부조리한 관습을 과감히 폐지하다. 이는 이이가 형식적인 예법보다 실질적인 도덕성과 공정한 문화를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10. 80쪽) 농부는 왜 사시사철 계절이 바뀌고 날짜가 변하는 것을 잘 알아 둬야 했을까?

 

 전통 사회에서 농사는 국가의 근본이었다. 씨를 뿌리는 시기를 놓치거나 서리가 내리는 날을 예측하지 못하면 한 해 농사를 완전히 망치게 된다. 이는 곧 굶주림과 죽음으로 직결되다. 따라서 24절기와 날짜를 정확히 아는 것은 농부에게 있어 최고의 전문 지식이자 생존 기술이었다. 세종이 《칠정산》 같은 역법서를 만들고 장영실을 시켜 측우기와 해시계를 제작한 이유도 백성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농사를 짓게 하기 위함이다.

 

 

11. 85쪽) 고려시대 때 ‘백정’은 일반 농민을 가리키던 말이었는데 왜 조선시대에는 천민이 되었을까?

 

 고려시대 '백정(白丁)'은 아무런 직역이 없는 평범한 농민을 뜻하다. 그런데 조선 초 세종이 도살업이나 유기 제조에 종사하던 소외 계층인 '화척'이나 '재인'들을 일반인과 융합시키기 위해 그들을 '신백정'이라 부르게 하였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이 그들과 섞이기를 거부하고 '백정'이라는 명칭을 기피하면서, 결국 이 단어는 '도살업을 하는 천민'만을 지칭하는 비속어로 변질되었다.

 

 

12. 117쪽) 조광조는 왜 사약을 받고 죽었을까?

 

 조광조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도학 정치'를 꿈꾸던 젊은 개혁가였다. 그는 공신들의 거짓 공적을 삭제하는 '위훈 삭제'를 단행하려 했으나, 이는 기존 기득권인 훈구파의 목줄을 죄는 행위였다. 위협을 느낀 훈구파는 나뭇잎에 '주초위왕(조씨가 왕이 된다)'이라는 글자를 꿀로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만든 뒤 왕에게 보여주는 등 모략을 꾸미다. 개혁의 속도에 지친 중종이 사림 세력을 외면하면서 조광조는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다.

 

 

13. 118쪽) 최후의 승자는 왜 사림파였을까?

 

 

 사림파는 사화(선비들이 화를 입음)를 통해 수많은 사림이 죽거나 유배당했지만, 그들은 꺾이지 않다. 지방의 '서원'을 통해 끊임없이 후배를 양성했고, '향약'을 통해 농촌 사회의 질서를 주도하였다. 결국 인재의 풀(Pool)과 도덕적 명분에서 앞선 사림파가 선조 대에 이르러 중앙 정치를 완전히 장악하며 조선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14. 209쪽) 역사는 왜 외우는 공부가 아니라 느끼고 생각하는 공부라고 말하는 것일까?

 

 역사는 박물관에 박제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수천 년간 쌓여온 인간들의 선택과 그 결과의 기록이다. 왕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름 없는 농부가 왜 봉기했는지 그들의 마음을 '느끼고', 그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지 '생각할 때' 역사는 비로소 살아있는 지혜가 된다. 연도나 이름을 암기하는 것은 금방 잊히지만, 역사를 통해 배운 통찰력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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