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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으로 읽는 한국사

박은봉의 <한국사 편지2>_후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112p~219p)

by 고전윤쌤 2026.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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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봉의 <한국사 편지 2> 정보

 

  • 서명: 한국사 편지 2 (부제: 후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 저자: 박은봉
  • 출판사: 책과함께어린이
  • 초판 발행일: 2009년 3월 13일
  • 쪽수: 약 219
  • 내용 소개: 후삼국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편지 형식으로 서술한 교양 역사서
  • 그림 / 구성: 박은봉 글, 류동필 외 그림

 

 

 

박은봉의 <한국사 편지2>_후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112p~219p)

 

 

 

 

<한국사 편지 2> 질문별 핵심 답변

1. 118쪽) 무신들은 왜 반란을 일으켰을까?

 

 1170년 보현사에서 일어난 무신 정변은 단순히 군인들이 권력을 탐해서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이는 고려 건국 이후 약 200년간 쌓여온 사회적 모순과 차별이 폭발한 결과이다.

 

첫째, 뿌리 깊은 숭문경무(崇文輕武) 사상과 신분적 차별이다. 고려는 문치주의를 지향하며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천시했다. 군대의 최고 지휘권인 상장군과 대장군직조차 문신들이 독점했으며, 무신들은 전쟁터에서 공을 세워도 그에 합당한 정치적 지위를 얻지 못했다. 무신들은 문신들의 하인처럼 취급받기도 했으며, 궁궐 호위나 토목 공사에 동원되는 등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혔다.

 

둘째, 경제적 불평등과 군인전의 미지급이다. 고려의 전시과 제도에 따르면 군인들에게는 국가로부터 군인전이라는 토지가 지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벌 귀족들이 토지를 독점하고 세습하면서 하급 군인들에게 돌아갈 토지가 부족해졌다. 생계를 위협받은 군인들은 평상시에도 강제 노역에 시원찮은 대접을 받으며 불만이 극에 달하다.

 

셋째, 문신들의 오만과 결정적인 모욕 사건이다. 의종은 정사는 돌보지 않은 채 문신들과 어울려 향락을 즐겼고, 그 과정에서 무신들은 병풍처럼 서서 그들을 호위해야 했다. 보현사로 가는 길에 일어난 ‘수박희’ 시합에서 늙은 장군 이소응이 패하자, 젊은 문신 한뢰가 그의 뺨을 때린 사건은 무신들의 인내심을 완전히 바닥나게 했다. 결국 정중부, 이의방 등은 이를 계기로 문신들을 몰살하고 무신 정권을 수립하다.

 

 

2. 129~133쪽) 고려시대 노비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이유와  봉기가 실패한 이유는?

 

 

<만적의 난>

 

 당시 무신 정권기에는 천민 출신인 이의민이 최고 집권자에 오르는 등 신분 질서가 크게 동요했다. 최충헌의 노비인 만적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소'라며 신분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평등 사상을 구호로 봉기를 일으켰다. 즉, 인간의 가치는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과 투쟁으로 쟁취할 수 있다는 근대적 인간 존엄의 싹을 보여주었다.

 

<망이와 망소이의 난>

 

 공주 명학소의 망이·망소이 형제는 고려의 가혹한 수탈에 저항해 일어났다. 정부는 처음에 이들의 기세를 꺾기 위해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켜 주는 척하며 회유책을 썼다. 하지만 이는 시간을 벌기 위한 기만책에 불과했다. 정부는 뒤로 대규모 군대를 조직해 토벌에 나섰고, 약속했던 세금 감면이나 신분 상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신들을 속인 정부의 태도에 분노한 망이와 망소이는 생존을 위해 다시금 두 번째 봉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 봉기가 실패한 이유>

 

 만적의 난은 치밀한 계획과 명확한 평등 의식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 밀고로 인해 실행조차 해보지 못한 채 무너졌다. 거사 직전, 함께 모의했던 노비 중 한 명인 한충유가 자신의 주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한충유는 신분 해방의 희망보다는 당장 주인에게 충성하여 얻을 보상이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것이다. 이는 당시 노비들이 처했던 심리적 위축과 연대의 어려움을 보여주며, 결국 만적과 동료들은 포대기에 싸여 강물에 던져지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였다. 

 

 망이, 망소이의 난의 봉기 세력이 거대해지긴 했으나, 이를 뒷받침할 정치적 대안과 조직력이 부족했다. 또한 초기에는 주변 지역의 호응을 얻었느나, 투장애 장기화되면서 점령 지역 백성들의 피로감이 쌓였고, 정부의 계속되는 회유와 압박 속에 지도부 내부의 단결력도 점차 약화되었다. 이에 정부는 정예병을 투입하여 봉기군의 근거지를 초토화시켰다. 결국 보급로가 끊기고 퇴로가 막힌 망이와 망소이는 예산 등지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 체포되어 처형됨으로써 난은 종결되었다.

 

 

3.  144쪽) 무신 정권의 몰락한 이유와 왕정이 복고된 이유는?

 

 백 년 동안 이어지던 무신 정권이 무너진 이유는 내부의 부패와 외부의 강력한 압력이 맞물렸기 때문이다.

 

첫째, 대몽 항쟁의 한계이다.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30년 넘게 항전했으나, 이는 지도층만의 안위일 뿐이었다. 본토에 남겨진 백성들은 몽골군의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에 노출되었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백성들은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면서 세금만 걷어가는 무신 정권에 등을 돌렸다.

 

둘째, 집권층 내의 분열이다. 최충헌 이후 4대에 걸친 최씨 세습 정권은 내부 암투로 약해졌다. 김준, 임연 등 측근 무신들이 권력을 찬탈하면서 정통성은 더욱 약해졌고, 이에 대항해 왕실을 중심으로 한 문신 세력은 몽골(원)과의 강화를 통해 무신들을 제거하려 했다. 결국 원나라의 군사적 힘을 배경으로 왕권이 회복되면서, 왕이 다시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4. 146
) 삼별초는 왜 개경 환도에 반대했을까?

 

 삼별초는 최씨 무신 정권의 사병 조직이자 국가 핵심 군사 조직이었다. 고려 왕실이 원나라와 강화하고 개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몽골에 무릎을 꿇는다는 선언이었다. 이는 삼별초에게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민족적 자존심의 굴복이고, 다른 하나는 조직의 소멸과 죽음이었다. 몽골은 자신들에게 끝까지 저항한 삼별초를 살려둘 리 없었기에, 그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신들의 대몽 항쟁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개경 환도를 거부하고 진도와 제주도로 옮겨가며 저항하다.

 

삼별초에 대해 평가해보자

 

- 긍정적 관점 : 세계 최강의 몽골 제국에 맞서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우리 민족의 강인한 자주정신과 기개를 보여준 상징적 존재이다.

 

- 비판적 관점 : 삼별초의 저항은 결국 무신 정권이라는 기득권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 과정에서 백성들이 겪은 희생은 외면했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5. 159쪽) 고려 사람들이 고려 대장경(팔만대장경) 간행의 이유는?

 

 고려 사람들은 몽골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재앙 앞에서 목판에 불경을 새기는 거대한 사업을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첫째, 불력(佛力)을 통한 국난 극복이다. 당시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성스럽게 새기면 그 신성한 힘이 외적을 물리쳐줄 것이라고 믿었다. 앞서 거란의 침입 때 만들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다시금 대장경을 만들며 민족적 위기를 이겨낼 정신적 지주를 찾고자 한 것이다.

 

 

둘째, 민족적 결속력 강화이다. 대장경 간행은 엄청난 인력과 예산이 드는 국책 사업이다. 이를 통해 뿔뿔이 흩어진 민중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우리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대내외에 과시하려 했다. 한 글자 한 글자 새길 때마다 절을 올렸던 그들의 정성은 극한의 위기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고려인의 의지를 담고 있다.

 

 

6. 171쪽) 역사책을 읽는 올바른 자세와 사관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역사책의 저자와 배경을 알아야 하는 이유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가에 의해 선택되고 해석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사건이라도 기록자가 문신인지 무신인지, 혹은 고려인인지 원나라 사람인지에 따라 서술 방식과 평가가 완전히 달라진다. 저자의 환경과 사관을 파악하는 것은 비판적 사고의 시작이며, 기록된 글자 너머의 진실을 읽어내는 열쇠가 된다.

 

"승리자만의 기록이 아니게 된다"는 말의 의미

보통 역사는 권력을 잡은 승리자의 관점에서 기록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저자의 의도와 당시의 시대 상황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읽으면, 기록자가 숨기려 했던 진실이나 소외된 패배자들의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다. 즉, 텍스트를 입체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역사를 단순한 과거의 박제가 아니라 생생한 삶의 현장으로 복원할 수 있다는 뜻이다.

 

 

7. 173쪽) 왕이 김부식에게 역사 편찬을 맡긴 이유?

 

인종은 묘청의 난 등 대규모 반란을 겪은 후 무너진 국가 기강을 바로잡아야 했다. 유학의 대가였던 김부식에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정리하게 함으로써 고려가 정통성 있는 국가임을 천명하고, 유교적 도덕 정치를 확립하여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8. 176쪽)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이유?

 

원 간섭기에 접어든 고려는 민족적 자긍심이 크게 훼손된 상태였다. 승려 일연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우리 고유의 신화, 전설, 민속 등을 수집하여 《삼국유사》를 썼다. 특히 단군신화를 기록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아주 오래전부터 하늘의 자손으로 시작된 독자적이고 유구한 역사를 가졌음을 강조하여, 몽골의 지배 아래 있던 고려인들에게 희망과 자부심을 심어주려 했다.

 

 

9. 188) 고려에는 왜 열 살도 채 안 된 여자아이를 서둘러 결혼시키는 조혼 풍습이 생겼을까?

 

 

고려 후기, 열 살도 안 된 아이들을 서둘러 결혼시키는 조혼 풍습이 생긴 것은 원나라의 공녀가 되는 걸 피하기 위함이였다.  원나라는 어린 처녀들을 뽑아 공녀라는 이름으로  원나라 황실이나 귀족의 노비, 후궁으로 데려갔는데, 일단 공녀 명단에 오르면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이를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이미 결혼한 여자가 되는 것이었다. 부모들은 내 딸이 머나먼 이국땅으로 끌려가 고초를 겪느니 차라리 일찍 혼인을 시켜 곁에 두려 했다. 

 

 

10. 201) 문익점은 왜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왔을까?

 

 당시 고려 사람들은 삼베나 모시로 옷을 해 입었는데, 이는 여름에는 시원하지만 겨울 추위를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가난한 백성들은 겨울마다 동상에 걸리거나 얼어 죽기 일쑤였다. 문익점은 솜을 넣은 옷과 무명 천이 얼마나 따뜻하고 실용적인지 목격했고, 이를 고려에 보급하면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위험한 선택 덕분에 고려 백성들은 비로소 겨울의 추위를 이겨낼 수 있게 되다.

 

 

11. 207) 최무선은 왜 왕에게 화약과 화통을 만드는 관청인 화통도감을 설치하자고 상소를 올렸을까?

 

 

 당시 화약 제조법은 원나라의 국가 기밀이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기술을 홀로 연구하는 최무선을 보고 주변에서는 "미친 짓"이라며 비웃었다. 하지만 최무선에게는 "우리 백성을 내 손으로 지키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그는 중국 기술자 이원에게서 힌트를 얻기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고, 수천 번의 실험 끝에 마침내 화약 국산화에 성공하다. 이 집념이 있었기에 진포 대첩에서 500여 척의 왜선을 불태우는 전무후무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12. 209쪽) 역사는 왜 외우는 공부가 아니라 느끼고 생각하는 공부라고 말하는 것일까?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날짜와 이름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만약 내가 뺨을 맞은 이소응 장군이었다면, 혹은 신분 해방을 꿈꾸던 노비 만적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상상해 보는 과정이 바로 역사 공부의 핵심이다. 과거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고뇌를 느끼고,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생각할 때, 비로소 역사는 지식이 아닌 지혜가 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목화씨를 가져오거나 화약을 만든 이들의 용기를 배운다. 결국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과거라는 거울을 통해 현재의 나를 돌아보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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