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은봉의 <한국사 편지 3> 정보
- 서명: 한국사 편지 3 (부제: 조선 건국부터 조선 후기까지)
- 저자: 박은봉
- 출판사: 책과함께어린이
- 초판 발행일: 2009년4월 21일
- 쪽수: 약 235쪽
- 내용 소개: 조선 건국부터 조선 후기까지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편지 형식으로 서술한 교양 역사서
- 그림 / 구성: 박은봉 글, 류동필 외 그림
박은봉의 <한국사 편지 3>_조선 건국부터 조선 후기까지(122p~235p)
<한국사 편지 3> 질문별 핵심 답변
1. 134쪽) 이유태가 꿈꾼 집과 관련하여 알 수 있는 조선 사회의 모습은?
일흔두 살의 관리 이유태가 살고 싶어 했던 집은 화려하고 웅장한 대궐 같은 집이 아니었다. 그는 '자식과 손자들이 함께 모여 살며, 조상에게 제사를 정성껏 지낼 수 있는 집'을 원했다. 가족들이 예절을 지키며 학문에 정진할 수 있는 소박하고도 질서 있는 공간을 꿈꾼 것이다.
이 집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조선 시대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 유교적 효(孝)와 예(禮)의 중시: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집은 단순히 잠을 자는 곳이 아니라, 조상을 모시고 가족 간의 도리를 실현하는 교육의 장이었다.
- 대가족 중심의 사회: 여러 세대가 한 울타리 안에서 살며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 검소함의 미학: 관직에 있었음에도 사치보다는 실용과 격식을 중시하는 선비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2. 140쪽) 조선의 신문, '조보'란? 정보의 독점하는 이유는?
‘조보(朝報)’ 는 조선 시대에 국가의 주요 소식을 관리들에게 알리기 위해 발행하던 오늘날의 신문과 같은 기록물이다. 왕의 명령, 인사 이동, 날씨, 주요 사건 등이 기록되었다. 조보는 소수의 지배층만이 볼 수 있었다. 조보가 일반 백성에게 고개되지 않고 관리와 지배층에게만 유통된 이유는 '정보가 곧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기밀이나 조정의 결정사항이 일반 백성에게 널리 퍼지는 것을 막아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려 했다. 백성들이 조정의 일을 속속들이 알게 되면 비판의 목소리가 높이는 것을 우려하려 '족보'를 독점하고 통제하려고 했다.
3. 173쪽) 왜 의병(義兵) 이 나라를 구한 주인공이었을까?
의병은 국가의 명령에 의해 소집된 정규군이 아니라,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백성들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조직한 민간 군대를 말한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정규군은 일본군의 조총 부대와 실전 경험에 밀려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의병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지형을 알고 이를 이용하여 일본군을 물리쳤다. 또한 가족과 내 땅을 지켜야 한다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있었기에 정규군보다 더 용맹하게 싸웠다. 일본군이 전방으로 나아갈 때, 후방에서 보급로를 끊어버림으로써 일본군의 진격을 늦추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4. 172~180쪽) 임진왜란의 발발 원인과 전쟁의 피해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내부의 혼란을 밖으로 돌리고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 그는 "명나라를 치러 갈 테니 길을 비켜달라(정명가도)"는 핑계를 대었으나, 실제 목적은 조선과 명나라를 정복하려는 영토 확장이었다.
7년간의 전쟁으로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다쳤으며 기술자와 도공 등 많은 사람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 전쟁으로 인한 논밭은 황폐해졌고 굶주림과 전염병이 창궐했다. 또한 불국사, 경복궁 등 소준한 건축물과 실록으 ㄹ보관하던 서고들이 불타 없어지는 등 막대한 문화적 손실을 보았다.
5. 189쪽) 광해군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한 이유는?
(강홍립 장군에게 밀명을 내린 이유는?)
중국은 만주에 자리잡은 청나라(후금)는 호시탐탐 명나라를 무너뜨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머지않아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차치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였다.
실리를 위해서는 청나라 편에 서야 했지만 당시 조선의 선비들은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다. 만약 광해군이 대놓고 명나라를 배신하려 한다고 알려지면, 신하들의 거센 반발로 왕위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실리를 택하기 위해 은밀히 움직여야만 했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강홍립 장군에게 군대를 주어 보냈지만, 동시에 "형세를 보아 향방을 결정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즉, 명나라를 돕는 척하되 상황이 불리하면 새로 떠오르는 세력인 청나라에 항복하여 조선 군대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전쟁을 피하라는 지시였다.
6. 192쪽) 병자호란 후 돌아온 포로들 중 여자들에게 유독 가혹했던 이유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사람들을 '환향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돌아온 양반 남성과 여성에 대한 대접은 천지차이였다. 남자는 전장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고생한 이들로 여겨져 사회 복귀가 비교적 쉬웠다. 하지만 여자는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가족과 사회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환향녀(화냥년의 어원)'라고 조롱받으며 이혼을 당하거나 집안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이러한 차별이 발생한 이유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성리학적 정절 관념이 극단적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목숨보다 '정절'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왜곡된 가치관이 전쟁의 피해자인 여성들을 다시 한번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7. 195쪽) 왕의 칭호: '조', '종', '군'의 차이
조선 왕들의 이름 뒤에 붙는 묘호는 그 왕의 업적에 따라 정해졌다.
| 구분 | 의미 | 대표적인 왕 |
| 조(祖) | 나라를 세웠거나(창업), 국난을 극복하여 큰 공이 있는 왕 | 태조, 세조, 선조, 인조 |
| 종(宗) |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왕위를 평화롭게 계승한 왕 | 세종, 성종, 숙종 |
| 군(君) | 왕위에서 쫓겨나 왕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 통치자 | 연산군, 광해군 |
보통 공로가 크면 '조', 덕이 많으면 '종'을 붙였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조'를 선호하는 경향이 생기기도 했다.
8. 207쪽)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는 동안 서양의 과학 기술과 천주교 등 새로운 문물을 접했다. 그는 조선이 성리학에만 갇혀 있을 게 아니라, 청나라와 서양의 앞선 문화를 받아들여 근대적인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은 더 빨리 변화의 물결을 타고 강한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9. 221쪽) 안용복이 일본으로 간 이유는?
안용복은 평범한 어부였지만,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를 침범하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 그는 일본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하기 위해 스스로를 '울릉도·독도 감세관'이라는 관리로 사칭하고 화려한 복장을 갖추어 일본으로 갔다. 그가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분명히 하고, 이를 관리하는 관리가 파견되고 있음을 보여주어 일본의 영유권 주장을 뿌리 뽑으려 했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 덕분에 일본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다"라는 공식 확인서를 받아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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